카테고리 없음

문제를 맡기라!

드림지기 2024. 9. 8. 18:44

지난 6월이었습니다.

마치 동맥경화처럼, 제 삶에 경화증이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일이 몰려드는데, 어느 순간 이걸 혼자 감당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뭔가 한계를 맞이하는 것 같아요."

 

그런 고백을 한 어느 날, 결국 입원을 해버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제게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 한계를 발견했을 때, 이상하게 방향 지시등 하나가 켜졌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등이었습니다.

 

교회가 한계선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은 몇 사람에게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등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돌아간 이들이 종교개혁자들이었습니다.

한계인 줄 알았고 끝인 줄 알았는데, 말씀으로 돌아가자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교회가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세상이 더러워질 대로 더렵혀졌을 때,

'이제 끝이구나' 했던 그 시대, 하나님이 보여주신 지시등을 따라 갔더니,

오늘 우리의 모판이 된 '개신교'가 탄생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처음 편 성경이 '사무엘서'입니다.

처음엔 왕들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싶었는데,

다윗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에 사무엘서를 펼쳤습니다.

지난 1학기에는 가나 혼인잔치 이야기부터 요한복음을 묵상하고 나눴는데요.

2학기에는 개심수 때부터 사무엘서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서를 준비하면서 김양재 목사님의 <그 한 사람>이라는 책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책에서 제 갈급한 마음에 생수처럼 다가온 대목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말씀은 누구에게 들리는 것일까요?

바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렘1:10) 사건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에서 종말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육체의 무너짐은 내 영혼의 성전이 제대로 세워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있어야 할 일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 내 지식, 내 힘의 한계를 맛보았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김양재 목사님이 말씀은 자신의 삶에서 종말을 경험한 사람,

다시 말해 한계를 경험한 그 때라고 적어두셨는데, 얼마나 힘이 되던지요.

하나님이 지금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무엘서를 펼쳐서 읽다가 한계를 만난 한 여인,

삶의 종말을 매일 경험하던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한나입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은혜가 넘치다', '풍성한 은혜'라는 뜻이에요.

이름처럼 은혜가 넘쳐야 하는데, 한나의 삶에는 눈물만 넘쳤습니다.

삼상1:7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삼상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그녀는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울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기도만 하면 그저 통곡만 터져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상1:11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한나는 생각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럽다고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시고 기억해주세요."

 

한나는 아이가 없는 현실이 하나님의 무심함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그런 생각을 가지는 분이 계신가요?

행여나 가난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일까요?

다른 사람보다 집안 식구의 승진이 늦은 건 하나님이 잊으셔서 그런 걸까요?

우리 아이가 남들보다 빠르지 않은 건,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한편으로는 맞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지요.

삼상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삼상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그렇게 바라던 아이를 허락하지 않으신 게 맞더라는 거예요.

그러나 브닌나가 격분시키듯, 하나님도 한나를 비참하게 하려고 내버려두신 걸까요?

하나님이 막으신 게 맞는데,

그 이유는 그녀를 파멸로, 끝으로 몰고 가려는 게 아녜요.

진짜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그런 겁니다.

 

며칠 전 쓴 칼럼의 제목이 <Beautiful Mind>입니다.

<뷰티풀 마인드>는 노벨상 수상자 존 내쉬와 아내의 사랑을 다룬 실화영화입니다.

실비아 나사르가 쓴 존 내쉬의 전기 제목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를

그대로 차용해 영화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존 내쉬는 MIT 교수에 천재 수학자지만 정신분열증 환자였습니다.

자아가 분열되고 망상까지 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내는 그를 더 사랑합니다.

남편은 남들보다 조금 아플 뿐,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마침내 존 내쉬가 노벨상을 받을 때 그의 수상수감은 아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신비로운 헌신적 사랑이었습니다.

거기엔 어떤 논리적 이유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내 존재의 이유이고 나의 모든 이유는 당신입니다.

 

존 내쉬는 누구도 풀지 못한 문제의 해법을 발견한 것보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사랑이 더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전기의 저자는 이런 아내의 사랑을 <뷰티풀 마인드>라고 이름붙였을 겁니다.

아프지 않았다면, 그런 사랑을 몰랐을 거예요.

아프지 않았다면, 노벨상 수상자인 나와 결혼한 아내가 대박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내가 잘나고, 내가 돈 많고, 내가 대단해서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한나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막지 않으셨다면, 사무엘은 한나 작품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엘가나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녀에게 있었기에 당연한 것으로 알았을 거예요.

그러나 한나는 알게 됩니다.

내게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앞서 말씀드린 김양재 목사님의 책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성경 어디에도 잘 먹고 잘사는 복을 형통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제 인생을 보아도 환난을 통해서 야망이 사라지는 대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점점 바뀌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야망이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내 죄가 보일수록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아이가 내 것이기에 사무엘은 야망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내가 사랑받고, 내가 건강해서, 내가 낳은 아이기에,

이 아이는 내 식으로 내가 원하는대로 키워도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한계를 만난 그녀는 야망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럼 왜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하실까요?

내가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맡기기 때문이에요.

 

사무엘이 내게서 나왔다면, 하나님께 쉽게 맡길 수 없었을 거예요.

내 힘의 결과물이 아닌 것을 철저히 인정했기에,

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뼈저리게 알았기에,

하나님께 드리고 맡길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야망은 내게서 시작해서 내가 주체가 되는 꿈이에요.

소망과 비전은 하나님께 맡겨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계는, 환난은 복입니다.

왜냐고요? 나의 끝에서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께 맡기기 때문입니다.

한계 앞에 왜 슬프냐고요? 내 야망이 파괴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그때 소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시작돼요.

 

갯벌 위의 배를 내 힘으로 밀고,

안 되면 수십 명이 모여 밀면 그건 야망이에요.

내가 내 힘으로 이루는 일이에요.

그러나 내 힘으로 절대 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순간,

밀물을 기다립니다.

썰물에 배를 둔 어부가 할 일은 '때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때가 되면 그 배는 바다를 항해할 테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야망의 사람은 악을 쓰지만,

소망의 사람은 때를 기다립니다.

비전의 사람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서 멀리 바다를 항해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인생을 우리 하나님께 맡겨 봅시다.

 

내 요건, 내 자격에서 시작하는 야망 대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하나님이 등을 밀어주셔서 달려가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길 꿈꿉시다.

우리의 사무엘도 우리가 만든게 아니라면,

하나님께 내어 놓을 수 있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맡기세요.

팀 켈러 목사님은 여기서 '맡긴다'는 표현이,

하나님의 품에 푹 기대고 안겨서

우리 모든 무게를 다 싣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야망은 어깨 힘이 들어간 상태요,

소망은 내 힘을 다 빼고 하나님께 안긴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맡겨야 할까요?

첫째, 여러분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시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g.o.d의 '길'이라는 노래가 큰 화두였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세상은 길을 몰라요.

그러나 크리스천은 길을 알아요.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길을 헤매지 마세요.

 

둘째, 여러분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 혹시 크고 작은 짐이 있습니까?

이번 학기에 하나님께 다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무언가 짐이 있다면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모든 짐을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는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한나는 돌보지 않으시는 줄 알았어요.

아뇨. 맡기지 않았으니 그럴 뿐입니다.

 

셋째,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모든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1절에는 모든 경영은 사람이 하더라도 결과는 하나님이 허락하신다고 말씀해요.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시다.

 

정리합니다.

저는 평생 야망과 비전의 차이가 궁금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해소가 되었어요.

오늘 한계, 인생의 종말을 겪고 있는 분이 있다면,

내 삶에 내 힘이 너무 들어가 녹초가 된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하나님의 밀물을 힘입어 항해하는 소망과 비전의 사람 되세요.